예리코 돌무화과 나무 | |
작성일 : 2015-12-22 조회 : 3855 | |
늘푸른 돌무화과나무는 열매를 제공하는 과실수다. 모양이나 맛은 무화과와 비슷하나, 크기가 작고 당도가 낮아 돌무화과라 부른다. 잎 모양도 무화과와 달리, 조그맣고 몽톡하다. 요즘에는 열매를 거의 안 먹고 가치도 예전만 못하지만, 성경 시대에는 귀한 나무였다. 다윗 왕실은 ‘바알 하난’이라는 사람을 배치해, 돌무화과 농장을 돌보는 임무를 맡겼다(1역대 27,28). 돌무화과나무가 목재로 적합했던 까닭이다(궁전과 성전만 향백나무로 내부를 꾸몄다). 향백나무에 비해 가볍고 구멍이 많아, 지붕에 주로 사용했다고 한다. 이집트인들은 돌무화과나무로 미라를 보관하는 관을 짰다. 지금도 썩지 않고 보존될 정도니, 내구력이 상당하다. 고대에는 열매도 먹었으나, 관리는 좀 어려웠다고 한다. 열매가 익기 전에 일일이 구멍을 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성숙하기 전에 떨어져 버린다. 돌무화과나무하면, 성경에서 두 사람이 떠오른다. 구약의 인물로는 돌무화과 농사를 짓다가 예언자로 나선 아모스다(아모 7,14). 아모스는 돌무화과가 잘 익도록 구멍 뚫어 주는 일을 했던 것 같다. 성경에는 아모스서가 다소 뒤에 놓여 오해를 일으킬 수 있으나, 이사야보다 앞 시대 인물이다. 부피가 작은 열두 예언자들을 한데 모았기에, 사대 예언서(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 다니엘) 뒤로 배치되었다. 아모스는 최초로 ‘예언서(書)’라는 장르를 연 선구자였다. 엘리야나 엘리사 등은 본인의 이름을 대표하는 예언서 없이 역사서에 섞여 등장한다. 기원전 8세기 아모스 시대에 들어서야 예언자들이 자기 신탁을 글로 남기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들을 ‘문서 예언자’라 불러, 이전 예언자들과 구분한다. 아모스는 유다 광야에 근접한 ‘트코아’ 출신이었다(아모 1,1). 베들레헴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그는 남왕국 출신임에도 북왕국에서 활동했는데, 그때는 두 왕국을 오가는 것이 다소 자유로웠던 것 같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처럼, 선구자가 나올 때는 그만한 배경이 있게 마련이다. 당시 북왕국 임금은 예로보암 2세로, 유능한 장수였다. 남왕국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으며, 두 왕국을 위협할 만한 외세도 없었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유다를 합해, 솔로몬 시대에 견줄만한 번영이 찾아왔던 것 같다. 그러나 부가 늘어남에 따라 빈부격차가 극심해지고, 부정부패가 기승을 부렸다(아모 5,11-12 8,4). 그 때문에 노예나 비참한 생활로 전락하는 이들이 속출했다(아모 2,6 8,6). 아모스를 시초로 한 문서 예언자들은 바로 이런 사회적 불평등을 계기로 등장한 것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우면 마음이 넓어지고 하느님도 찾기 쉬울 것 같으나, 실제로는 반대의 결과가 자주 나타난다. 게다가 아모스서는 2800여 년 전에 선포된 신탁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비슷한 세상에서 살고 있지 않나? 돌무화과에 얽힌 두 번째 인물은 신약에 나온다. 예수님이 예리코를 지나실 때, 세관장 자캐오가 주님을 보려고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다(루카19,1-10). 지금도 예리코에는 자캐오 나무로 전해지는 고목이 있다. 평균 수명이 육백 년 정도니 그때의 나무는 아니겠지만, 여럿이 앉을 만큼 우람하다. 당시 세관장은 우리나라 일제 시대 앞잡이와 의미가 비슷했다. 세금으로 동족을 등쳐, 제 배불리기에 급급했던 졸부다. 로마에 바칠 세금을 거두는 과정에서, 자기가 착복할 금액까지 함께 갈취했다. 그러니 자캐오는 죄인이었던 동시에, 로마를 뒤에 업은 권력자였다. 그런데 존경받는 예언자가 나타나자, 그는 권력을 이용해 예수님을 호출해보려 하지 않고 죄인처럼 나무로 기어 올라간다.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 못하던 세리와 같이(루카 18,13). 그러자 예수님이 그를 부르셨다. 그런데 그날 처음 보신 자캐오의 이름을 어떻게 알고 계셨는지? 자캐오도 그것이 궁금하지 않았을까 싶다. 소경을 고치신(루카 18,35-43) 대단한 예언자가 제 이름을 알고 있으며, 자기 같은 이를 사람대접해 주신다는 것. 이에 감동한 자캐오는 이제껏 숨겨왔을 속내를 밝힌다. “사기 쳐 먹은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돌무화과나무는 자캐오를 예수님께 인도해, 뒤틀린 인생을 바로잡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지금도 예리코의 돌무화과 밑에 서면, 김춘수 님의 시 ‘꽃’ 같은 자캐오의 신앙 고백이 들려오는 것 같다. “그가 나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나는 그에게로 가서 꽃이 되었다.” 출처 : 가톨릭신문 “이스라엘 이야기” 김명숙(소피아)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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