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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의 성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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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번 게시글
예루살렘 개요
작성일 : 2015-12-14     조회 : 3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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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성지, 예루살렘은 늘 기대와 설렘을 주는 도시다. 예루살렘은 유다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모두의 주요 성지로, 어떤 장소는 시간대별이나 구역별로 나눠 이들 세 종교가 관리한다. 예루살렘은 유다인들에게 역사와 종교와 민족 의식의 원천이고,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현장이다. 또 이슬람교도들에게도 예루살렘은 중요한 성지이다. 그래서 거대한 옛 도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구시가지에는 유다인 지역과 아르메니아 지역, 그리스도교 지역, 무슬림 지역 등 4개 지역으로 구분돼 있다. 1948년 아랍과 이스라엘 전쟁 이후, 구시가지와 동(東)예루살렘은 트란스요르단에, 서(西)예루살렘은 이스라엘에 분할되었다가 1967년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을 점령했다.

   

 

지형적으로 동쪽으로는 키드론 골짜기와 남쪽으로는 힌놈 골짜기의 가운데 솟은 구릉에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것은 기원전 약 3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산악 지형의 예루살렘은 외부 침입을 쉽게 막을 수 있는 성채를 중심으로 서서히 도시가 발전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 후 약속된 땅을 분배할 때 예루살렘은 본래 벤야민 지파에 속하였던 곳이다(여호 18,11-28 참조).

 

성경의 기록을 보면 예루살렘의 가장 유명한 지도자는 다윗왕이다. 기원전 약 1000년경 이스라엘의 선조 다윗 왕이 구릉에 위치한 ‘시온의 성’이라 불리던 도시를 정복한 후 유다인들은 이곳을 ‘다윗의 성’이라 불렀다. 다윗 임금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에 사는 여부스족을 치려 하자, 여부스 주민들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너는 이곳에 들어올 수 없다. 눈먼 이들과 다리 저는 이들도 너쯤은 물리칠 수 있다.’ 그들은 다윗이 거기에 들어올 수 없으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시온 산성을 점령하였다. 그곳이 바로 다윗 성이다”(2사무 5,6-7).

 

그는 계약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겼고 그의 아들 솔로몬은 예루살렘의 첫 성전을 건축했다. 그 이후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민족과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서른 살에 이스라엘 임금이 된 다윗은 헤브론에서 7년 반 동안, 예루살렘에서 33년 동안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다(2사무 5,3-5 참조).

 

다윗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솔로몬 왕은 도시에 왕궁과 신전 및 성채를 새로이 건설하고 언약궤를 신전 안에 보관하였다. “또한 주님께서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실 때에 그들과 맺으신 계약을 넣은 궤를 둘 곳을 여기에 마련하였소”(1열왕 8,21).

 

예루살렘은 신약에서도 중요한 장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활에서 시작하여 그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이 이뤄진 장소이다. 성령 강림 후 사도들은 한동안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교회 공동체를 구성하여 복음을 선포하였다.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사도 6,7).

 

고고학적으로 예루살렘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석기 시대부터 인류가 정착한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예루살렘에는 기원전 4000년경부터 사람이 살았으며, 기원전 3000~2000년경에는 제법 큰 도시를 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모든 생활 문화의 중심지요 위대한 왕의 성읍이었다. 그러나 강대국 사이에 있었던 예루살렘은 역사적인 우여곡절을 겪으며 수 세기 동안 정복당하고 파괴되며 다시 건설되기를 반복했다.

 

성경에서 예루살렘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직전 여부스족이 예루살렘에 거주했으나 베냐민과 유다 지파에 의해 일시적으로 점령됐다(판관 1,8).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여부스족과 함께 거주했다. “벤야민의 자손들은 예루살렘에 사는 여부스족을 쫓아내지 않았다. 그래서 여부스족이 오늘날까지 예루살렘에서 벤야민의 자손들과 함께 살고 있다”(판관 1,21).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발전했던 다윗 시대에 예루살렘은 완전히 정복,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가 됐다(1역대 11,7). 이어 솔로몬에 의해 요새로 강화되고 성전이 건립됐다(1열왕 9,15).

 

예루살렘은 남쪽 유다의 르하브암 왕 때 이집트 왕 ‘시삭’의 침입을 받았다(2역대 12,2). 또 유다 임금 아마츠야 때 북이스라엘 왕 여호아스로부터 공격을 받기도 했다. 이스라엘 임금 여호아스는 아하즈야의 손자이며 요아스의 아들인, 유다 임금 아마츠야를 벳 세메스에서 사로잡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에프라임 성문’에서 ‘모퉁이 성문’까지, 예루살렘 성벽 사백 암마를 무너뜨렸다”(2역대 25,23). 그리고 예루살렘은 기원전 586년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함락된 뒤 약 70년간 황폐한 채로 바빌론 총독의 지배를 받았다(예레 25,11).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칙령으로 포로들이 귀환해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시작했다(에즈 1,2). 그러다 기원전 333년에는 마케도니아 알렉산더 대왕이 예루살렘을 정복했다. 기원전 63년에는 로마의 폼페이우스에 의해 정복당하고, 기원후 70년 로마 장군 티투스에게 예루살렘은 함락됐다. 제2차 유다전쟁(135년) 때 하드리아누스는 다시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예루살렘 성전 자리에 주피터 신전을 건설하고 골고타 언덕 위에는 비너스 신전을 지어 유다교와 그리스도교를 동시에 말살하려 했다.

 

그러나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공인되면서 예루살렘은 각광을 받고 그리스도교의 중심 도시로 재건됐다. 그러다가 무슬림들이 637년에 예루살렘을 정복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진격했다. 1099년 십자군 군사들이 정복할 때까지 예루살렘은 이슬람 도시로 인식됐으며, 1517년에 투르크 족이 예루살렘에 침입해 도시의 성벽을 세웠다.

 

예루살렘은 이슬람과 십자군의 몇 차례에 걸친 탈환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1917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터키의 지배를 받다가 1923년 영국의 위임 통치를 거쳐 제2차 세계대전 후 이스라엘의 수도가 됐다. 예루살렘은 길고 험난한 구세사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도시이다. 성벽과 길바닥의 돌 하나하나가 수천 년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출처 : 평화신문 "성경 속의 도시" 허영엽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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